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(문단 편집) === 조이아 차우셰스쿠 === [[파일:external/america.pink/2-zoia-ceausescu.jpg]] [[1949년]] [[3월 1일]] ~ [[2006년]] [[11월 20일]] Zoia Ceaușescu 조이아의 경우도 오빠 발렌틴의 경우와 비슷하다. [[수학]]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을 때 조이아는 정권의 실체를 알고 역겨워 했다. 그래서 1974년 그녀는 [[가출]]을 했는데, 이 가출이 '조이아 사건'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장이 커지게 된다. 그녀가 가출하자 [[비밀경찰]]이 그녀를 찾기 위해 총동원됐다.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와 친한 사람들을 모조리 가둬 그녀의 소재를 심문했다.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그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후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. 이렇듯 젊은 여성으로서의 조이아의 생활은 [[악몽]] 같았으며,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었지만, 결국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. 그런데 그 후 차우셰스쿠와 엘레나는 조이아에게 역심을 품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는데, 그들은 조이아와 친하게 지낸 수학연구소 일원들이 조이아를 심리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다. 그래서 그들을 조이아에게 보헤미안 기질을 주입시켰다는 이유로 연구소를 해산시켜버린 뒤 연구원들을 다른 연구소로 다 분산시켰다. '조이아 사건'의 충격이 루마니아 학계에 미친 영향은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. 결국 조이아 사건으로 약 200명이 넘는 능력 있는 [[수학자]]들이 루마니아를 떠나 [[미국]]으로 건너가야 했다. 그러자 조이아는 인맥을 동원하여 수학연구소 일원들에게 출국비자를 얻어 주었는데, 이것이 차우셰스쿠 부부를 화나게 만들었다. 애시당초 부부는 조이아가 수학을 공부하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. 결국 부쿠레슈티 대학의 심리학과도 폐쇄해 버렸다. 그러자 그녀는 이후 부모와는 거의 데면데면하게 지냈고, 부모가 혁명으로 죽은 후에는 조이아도 체포되었으나, 8개월 후 풀려났다. 그러나 조이아는 전의 직장에 복귀하지 못했고, [[스트레스]]가 심했는지 [[담배]]를 껴안고 살았으며, 결국 2006년 가을, 57세라는 나이에 [[폐암]]으로 세상을 떠났다.[* 남동생 니쿠가 죽고 꼭 10년만에 본인도 고인이 되었다.] [[영어 위키백과]]에 따르면 [[1980년]] 미르체아 오프레안(Mircea Oprean)이라는 공학자(당시 부쿠레슈티 공과 대학 교수)와 [[결혼]]하였다고 한다. 그러나 자녀는 없었다. 차우셰스쿠 부부 사후에도 오빠처럼 공식적으로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증언들을 남겼다. [[차우셰스쿠의 아이들]]을 비밀 경찰을 통해 감시해 악영향을 남겼으며, 아버지가 게오르기우데지가 사망하고 나서 서기장이 된 이후에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